항목 ID | GC08300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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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地名- 寧越-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강원도 영월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엄흥용 |
[정의]
강원도 영월군의 지명을 통해 본 영월의 역사와 문화.
[영월의 역사와 지명]
영월의 역사유적지로는 조선 6대 단종의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 단종의 묘역인 영월 장릉, 19세기 방랑시인 난고 김삿갓 유적지,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 등이 있다. 봉래산 정상에 위치한 별마로천문대는 별 관측지로 최적의 여건을 갖춘 곳이며, 행글라이더 장소로도 각광받고 있다. 영월은 어린 단종이 유배 생활을 하였던 곳으로 단종과 관련된 지명과 유적이 많다. 3면이 강으로 둘러 쌓인 청령포는 단종의 유배지로 1763년(영조 39) 9월에 영조가 어필로 쓴 ‘단묘재본부시유지비(端廟在本府時遺址碑)’와 1726년(영조 2) 영월부사 윤양래(尹陽來)가 쓴 ‘청령포 금표비(淸泠浦禁標碑)’ 등이 있다. 동을지산 언덕 장릉에는 1733년(영조 9) 예조판서 이성룡(李聖龍)이 전서체로 쓴 ‘조선국단종대왕장릉(朝鮮國端宗大王莊陵)’이라는 능비, 268위 충신의 위판을 모신 장판옥(藏版屋), 신비로운 제정(祭井)인 영천(靈泉), 어린 단종을 장사 지낸 충의공 ‘엄흥도 정려각(嚴興道旌閭閣)’, 1793년(정조 17)에 영월부사 박기정(朴基正)이 쓴 ‘배견암(拜鵑巖)’이라는 바위 글씨 등이 있다. 영월군민들은 1967년부터 ‘단종문화제’를 개최하여 왕릉에 제향을 올리고 단종의 고혼과 충신들의 넋을 위로하였다.
[영월 땅이름의 뿌리를 찾아서]
땅 이름에는 우리 지역에서 살았던 선조들의 숨결과 삶의 애환이 담겨 있다. 그러나 선조들에 의하여 다듬어진 아름답고 소중한 땅 이름이 신라 경덕왕(757년) 때 ‘가람’은 강(江), ‘뫼’는 산(山) 따위의 한자어로 고쳐졌고,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왜색형 지명(倭色型地名)으로 바뀌는 또 한 번의 수난을 겪어야 하였다. 그러나 왜곡된 땅 이름을 되찾는 일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우리 고장에서 부르던 “가랍마을, 가래실, 가르내, 각시베리, 개굴재, 달이말, 띠재, 개금두둑, 개살이, 거리실, 건너들, 고지기재, 긴소, 골너다리, 골어구, 곰배나무골, 곱돌재, 구둘바위, 꽃내미재, 꽃밭머리, 꽃꺾이재, 꼴두바위, 나래실, 나랭이, 날그랭이, 낮저자, 널다리, 단여울, 달마중터, 달앗, 대밭나드리, 댕댕이골, 도리골, 덜미기, 독바우, 돌서더기, 돌팀이골, 두무실, 든돌, 마름실골, 말구리재, 매뱅이, 머나실, 먼내벌, 모시개, 물도리, 뒷말, 물거리, 바깥새내, 바닥터, 바랑이골, 밝은밭, 방아소, 뱃두둑, 뱃눌고라대이, 벼름이, 빈터거리, 사슬치, 산도아치, 산이실, 살개바위, 살담여울, 삽둔, 새내기골, 새비재, 샘둔지, 설통바우, 솔안이골, 숯가마, 산아몰, 샛말, 새술막, 위뜸, 아들바우, 아홉살이골, 안간지골, 안도내, 어둔골, 약물내기, 여막골, 영날, 오고랭이골, 오누이골, 외기재, 웃구름, 울여울, 으내곡, 음지뜸, 음지마을, 윗댜랭이골, 아래뜸, 작골, 작은터골, 장광들, 장승개, 잿말, 저름박골, 저자거리, 진밭, 질기실, 진배미, 찬물나드리, 참나무재, 큰마을, 큰버덩, 큰서덕, 큰두무치, 탑둔지, 텃골, 톡실, 팟뱅이골, 한울샘[하늘샘], 한골, 한오금, 행금벌, 한울리” 등의 아름답고 정감 어린 땅 이름을 찾아내고 잘 보존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일이다.
[영월의 자연을 닮은 지명]
영월은 자연 형상이나 지형 등을 닮은 지명이 많다. 그리고 역사 유적지와 함께 자연경관이 빼어난 지명도 많다. 남한강은 풍부한 수량과 수려한 주변 풍광으로 이름이 높다. 전국 최고의 래프팅 코스로 유명한 거운리의 어라연(魚羅淵), 4억 년의 신비를 간직한 천연기념물 영월 고씨굴, 서강변에 위치한 영월 선돌[명승], 주천강과 평창강이 합수되는 지점에 형성된 영월 한반도지형[명승], 주천강변에 위치한 요선정과 화강암 암반의 영월 무릉리 요선암 돌개구멍[천연기념물], 상동읍의 구래리에서 천평천과 어평천 물줄기가 합쳐지는 아우라지 등이 유명하다.
아름다운 동강을 배경으로 매년 8월에 영월 동강둔치에서 동강뗏목축제, 10월에는 김삿갓계곡에서 난고김삿갓문화제가 펼쳐진다.
영월에는 8경이 있었으나 근래에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제1경 장릉, 제2경 청령포, 제3경 별마로천문대, 제4경 김삿갓유적지, 제5경 고씨굴, 제6경 선돌, 제7경 어라연, 제8경 한반도지형, 제9경 법흥사, 제10경 요선암과 요선정이 영월 10경이 되었다.
영월은 지붕 없는 박물관의 고장으로 강원도탄광문화촌, 조선민화박물관, 동강사진박물관, 단종역사관, 난고김삿갓문학관, 묵산미술관, 호야지리박물관, 영월곤충박물관 등이 영월 곳곳에 분포되어 있다. 난고김삿갓문학관은 방랑시인 김삿갓의 시대정신과 문학적 위상을 재조명하기 위한 곳이다. 김삿갓의 묘와 시비가 세워진 문학의 거리가 있고, 김삿갓이 생활하였던 거주지가 복원되었다. 1998년도부터 매년 가을에 김삿갓의 시대정신과 문학세계를 기리는 ‘난고김삿갓문화제’가 개최된다.
[민중의 삶을 간직한 지명]
지명은 그 지방의 역사와 자연환경, 풍습, 전설, 토속 신앙 등 민중의 삶을 간직하고 있는 향토사 연구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지명을 통하여 영월에서 살아온 선조들의 삶과 생활 방식을 엿볼 수 있다. 영월은 최고의 절경을 자랑하는 국민의 강 동강(東江)이 도심지 한가운데로 흘러간다. 이 물길은 100여 년 전까지도 정선이나 영월 문산, 거운, 삼옥 등지에서 소나무로 뗏목을 엮어 서울 한강나루로 운반하는 뗏꾼들의 노랫가락이 울려 퍼지던 곳이다. 뗏목은 정선 가수리를 출발하여 서울에 도착하기까지 영월의 황새여울, 된꼬까리, 둥글바위, 범여울, 울여울과 단양의 군관여울 등의 지명을 가진 험한 뱃길을 지나야 하였다. 지금도 그 당시 뗏꾼들의 애환과 한이 동강 곳곳에 서려 있다. 그중에도 영월 거운리 만지나루터 아래는 물길이 험하여 수많은 뗏목들이 뒤로 꼬꾸라져 뗏꾼들이 죽음을 당하는 험한 여울목이어서 ‘된꼬까리’라는 지명이 생겼다. 그 당시 뗏꾼들은 서울을 다녀오면 큰돈을 벌었다. 떼돈을 번다는 말은 뗏꾼들에게서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뗏꾼들은 돈을 많이 벌었고, 또, 그만큼 돈도 잘 썼는데, 거운리 만지나루터에서 주막을 차려 놓고 술장사를 하였던 전산옥은 구성진 가락으로 아라리를 잘 불러 뗏꾼들에게 최고의 인기였다. 그 당시 뗏꾼들이 부르던 노래 가사에도 전산옥의 이름이 등장할 정도였다.
“황새여울 된꼬까리에 떼를 띄어 놓았네
만지산의 전산옥(全山玉)이야 술상 차려 놓게나
오늘 갈지 내일 갈지 뜬구름만 흘러도
팔당주막 들병장수야 술판 벌여 놓아라.”
지금도 영월 거운리 만지나루터에는 전산옥이 살던 집터가 남아 있다. 전산옥의 주막은 1936년 병자년 가력 때 큰 홍수로 허물어져 북면 마차로 이사를 하였다. 노년에는 영월읍 덕포리의 큰딸 집에서 임종을 맞이하였다.
[옛 신화와 전설을 품은 지명]
영월에는 옛 신화와 전설을 품은 지명들이 수없이 많다. 그리고 곳곳에 아기장수와 연관된 지명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영월읍 하송리 엄씨 집안에서 아기 장수가 태어났다. 삼칠일에 걷고, 시렁 위에 올라가 잠을 자는 등 집안과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엄씨 집안에서 장사가 났다는 소문이 퍼지자 나라에서는 아기 장수가 장차 역적이 될 것이 두려워 죽이려 하였다. 포졸들이 와서 칼로 찌르고 커다란 연자방아를 올려놓아도 결국은 죽일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기 장수는 부모님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아버님 제가 때를 잘못 타고 태어난 것 같습니다. 오늘 저녁 쌀 서 말로 술을 만들어 그것을 저에게 먹이면 깊은 잠에 빠질 것입니다. 그때 겨드랑이 밑에 있는 날개를 인두로 없애 버리면 저는 힘을 못 쓰고 죽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날 밤 눈물을 흘리며 날개를 태워 버리자 아기 장사는 죽었다. 지금도 그 무덤이 하송 1리 노인정 뒤에 있다. 아기 장사가 죽은 후, 덕포리 용마굴에서 바위를 뚫고 나온 용마가 주인을 찾아 사흘 동안 밤낮으로 울부짖었고, 합수거리에서 장수의 칼이 윙윙거리며 울어대는 소리가 영월 전역에 퍼졌다고 한다. 이때 주인을 찾지 못하고 죽은 용마의 무덤은 덕포리 상리에 있었고, 칼은 합수거리의 깊은 소에 빠졌다. 그때부터 칼이 빠진 소를 검봉연(劍鳳淵)이라 하였는데, 훗날 ‘금봉연(金鳳淵)’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용마무덤은 상리 용마굴 앞에 있었는데, 도로 확장 공사로 없어졌다.
영월 지역에는 아기장수와 용마굴(龍馬窟) 이야기 외에도 거운리 정씨 집안 아기장수, 연당리 초로봉(草露峰) 아기장수, 와석리 든돌(擧石里) 들모랭이 용마무덤, 소목의 용마전설, 주천면 도천리 최씨 집안 아기장수, 주녹골 지씨 집안 아기장수, 무릉도원면 저치(低峙)재 말무덤, 도원리 용마개울, 안도내 용마무덤과 용소 등 수없이 많은 지명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영월군 한반도면 쌍용리(雙龍里)는 용과 연관된 지명이 많은 곳이다. 1914년 4월 1일 면 단위 통합이 이루어졌는데, 동리 이름에 쓰이는 평(坪), 촌(村), 치(峙) 등 다양한 명칭을 모두 리로 통폐합한다는 방침에 따라, 용들 위쪽인 용상리(龍上里)와 아래쪽인 용하리(龍下里)를 합하여 쌍용리라 하였다. 쌍용양회 원석광이 개발되기 전에 고촌[서창(西倉)이 있던 곳] 마을 뒷산에서 보면 쌍용리의 지형은 마치 용이 승천하는 형상이어서 용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즉, 서곡정사가 있는 탑골과 용정원은 용의 머리에 해당되고, 쌍용양회가 있는 용들은 허리, 그리고 샅둔[삽둔]은 용의 두 다리가 갈라지는 샅, 용동골을 용의 아랫부분, 곡금이는 꼬리 부분에 속한다. 특히, 쌍용리 삽둔은 용하리로, 월촌과 용동골 사이에 있다. 쌍용리의 지형이 용의 형상이므로 허리 부분에 해당하는 용들을 중심으로 머리 쪽을 용상리, 꼬리 쪽을 용하리라 하였다. 삽둔리는 용의 허벅지인 샅에 해당되는 위치에 있는 마을이므로 ‘사이의 뜸[마을]→샅뚬→샅둔→삽둔’으로 변하였다. ‘샅’은 ‘사이[間]’라는 뜻으로 복합어의 앞 음절로 올 때는 ‘삽’으로 변한다. ‘샅’과 관련된 단어로 좁은 골짜기 사이를 ‘고샅’이라 한다. 그리고 씨름을 할 때 두 다리 사이에 거는 헝겁 끈을 ‘샅바’라 부른다. ‘사이뜸’의 ‘뜸’은 큰 마을 옆에 몇 집 모여 사는 작은 동네를 의미한다.
상동읍 본구래(本九來)로 가자면 하천평리(下川坪里)[냇들] 봉우재마을에서 봉우교를 지나야 한다. 1923년 상동 중석광이 개광되기 전에는 봉우재마을이 상동의 중심지였으며, 마을 뒤에는 백운산(白雲山)[1,426.2m]을 경계로 정선군 고한읍 박심마을과 접하고 있다. 자장법사(慈臧法師)가 644년 당(唐)나라에서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가져와 정선 정암사(淨巖寺)[일명 갈래사(曷來寺)]와 적멸보궁(寂滅寶宮)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하였다. 어느 날 꿈에 문수보살이 “태백산 갈반지(葛蟠地)에서 절터를 찾으라.”라고 현몽하였다. 그래서 자장법사가 절터를 찾기 위하여 아홉 번이나 다녀간 곳에 구래리(九來里)라는 지명이 붙었다. 절터를 찾아다니던 자장법사는 수백 년 묵은 아름드리 칡넝쿨에 앉아 쉬게 되었는데, 이 넝쿨이 워낙 크고 신비하여 그 줄기를 따라 가보니 상동을 지나 정선 땅까지 뻗어 있었다. 자장이 당도하여 보니 가히 부처님의 사리를 모실만한 천하의 명당이었다. 흰 눈이 쌓인 겨울철인데도 칡꽃 세 송이가 붉게 피어 있었다. 정암사는 칡 줄기가 뻗어 점지하여 준 ‘삼갈반처(三曷盤處)’의 명당이므로 일명 ‘갈래사(葛來寺)’라 한다. 자장은 서해에서 가져온 마노석으로 ‘수마노탑’[보물]을 세우고, 사리를 모신 후에 적멸보궁을 지었다. 그 당시 자장법사가 본구래 물방아골 관음전에 거처하면서 명당을 찾았는데, 1962년 텃밭을 일구다가 27㎝ 크기의 7세기경 금동불상이 출토되어 서울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지명과 함께 돌아보는 영월]
첫 번째 코스는 영월 둥글바위, 어라연, 뗏꾼들의 쉼터 만지나루 전산옥 주막터, 영월 고씨굴, 김삿갓 유적지, 본구래, 아우라지 등으로 자연경관과 민중의 삶과 연관된 지명을 둘러보는 탐방 코스이다. 두 번째 코스는 영월 장릉, 영월 청령포, 영월 읍내 자규루, 관풍헌, 하송리 아기 장수 말 무덤, 검봉연, 별마로천문대 등으로 역사·전설 지명 탐방 코스이다. 세 번째 코스는 영월 선돌, 쌍용리 지형, 영월 한반도지형, 주천샘, 청허루, 빙허루, 요선정 및 요선암, 법흥사 등으로 자연지형과 연관된 지명 탐방 코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