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300250 |
---|---|
한자 | 角汗峙 馬房- |
분야 | 지리/자연 지리 |
유형 | 지명/자연 지명 |
지역 | 강원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윤석 |
해당 지역 소재지 | 각한치 마방터 - 강원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 |
---|---|
성격 | 지명 |
[정의]
강원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의 각한치에 있던 마방 자리.
[개설]
각한치(角汗峙)는 영월군 남면 연당리와 광천리 사이, 검각산의 북쪽, 서강의 남쪽에 있다. 영월에서 제천으로 가려면 반드시 지나야 하는 매우 오래된 언덕이다. 현재 각한치를 넘어가는 길은 도로로는 쓰이지 않는다. 조선 시대에 다니던 길은 일제 강점기 때 새로 길을 내면서 자리가 바뀌어서, 원래 각한치는 ‘옛 각한치’라 하여 위쪽 계곡 옆으로 길이 있다고 한다. 각한치를 넘어가는 상인이나 행인들은 각한치에 돌탑을 쌓고 마을의 풍년과 여행길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마방(馬房)은 일반적인 주막보다 규모가 커서 말에게 먹이를 주고 재울 수 있는 시설이 있는 곳을 말한다. 각한치는 높은 고개이므로, 각한치 아래에는 여행객을 위한 숙소인 마방이 있었다.
영월에서 출발하여 서강의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건넌 후 각한치를 넘어서 제천으로 가게 되는데, 서강에서는 고사전(告祀錢)이라는 돈을 추렴하여 매년 음력 2월에 서낭신(城隍神)에게 제사를 지낸 후에 뱃전에다 실을 감고 삼색실과(三色實果)와 술을 준비하여 용왕신(龍王神)에게 고사를 올리는 풍습이 있었다. 서강 나루터 앞의 ‘뱃터거리’ 마을에서 영등 할머니가 오신 날에 고사를 올렸다고 한다. 각한치를 넘어 다니던 시절에는 각한치에 서낭당이 있었는데, 1973년 새마을운동이 한창 고조되었을 때 관청에서 불태웠다. 서강 나루터에서 각한치로 올라가는 입구에 사시사철 시원한 물이 솟아나는 샘이 있어서 각한치를 넘나드는 행인들이 목을 축일 수 있었다.
[명칭 유래]
각한치는 영월에서 제천으로 가는 길에 있는 검각산을 넘어가는 고개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가근동현(加斤洞峴)’이 군의 서쪽 14리[5.5㎞]에 있다고 하였고, 김정호의 『청구도(靑邱圖)』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그리고 『만기요람(萬機要覽)』에는 각근치(角斤峙)라고 되어 있으며,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의 1872년에 제작된 「영월지도」에는 각한치(各漢峙)로 표기되어 있다. 또 규장각 소장의 『해동지도(海東地圖)』 영월부에는 각척치(角斥峙), 『광여도(廣輿圖)』 영월부에는 가척치(加斥峙)라고 하였다.
각한치라는 지명에 대하여 소의 뿔에서 땀이 날 정도로 넘기 힘든 고개라는 설명을 하기도 하나, 각한치라는 이름은 조선 전기의 ‘가근동현(加斤洞峴)’이 변한 말로 보인다.
[관련 전설]
각한치에 있던 마방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여 온다.
각한치를 넘어 다니며 소 장수를 하던 사람이 일찍이 아내를 잃고 외아들을 키우며 살았다. 아들이 결혼하여 며느리와 함께 살게 되었으나, 불행히도 몇 달 만에 아들이 죽었다. 소 장수는 청상과부가 된 며느리를 개가시킬 생각이 있었으나 이럭저럭 시간이 흘렀다. 어느 날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독살하려다가 실패하게 되는데, 시아버지는 며느리를 용서하고, 돈을 주어 개가시킨다. 이후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던 시아버지는 돈도 없고 건강도 나빠져서 폐인이 되어, 젊어서 장사하러 다니던 강원도 땅이나 가 보겠다고 하여 나섰다가 각한치에 이르러 쓰러졌다. 마침 젊은이가 나타나 소 장수를 구해 주었는데, 옛날 소 장수가 각한치를 넘나들 때 묵던 각한치 마방에서 일하던 노처녀와 하룻밤 인연을 맺었을 때 생긴 아들이었다. 소 장수는 다시 가정을 이루어 각한치 마방에서 살고, 소식을 들은 며느리도 찾아와 땅을 사 주고 갔다고 한다.
[자연환경]
검각산은 산봉우리가 날카로워 봉각산(鋒閣山)이라고도 하는데, 중국 촉(蜀)의 험한 산 검각(劍閣)에서 따온 명칭이다. 과거에 영월에서 제천으로 가는 중요한 도로에 있던 각한치는, 현재는 철도와 자동차 도로 모두 터널을 뚫어서 통행하고 있다.
[현황]
1956년 영월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각한치 밑으로 터널을 뚫어서 과거의 각한치를 넘던 길은 기차가 다니는 철도의 터널로 바뀌었다. 2004년 국도 제38호선의 각한터널이 완공되면서 각한치는 이제 터널의 이름으로만 남은 과거의 고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