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기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300801
한자 尹基永
영어공식명칭 Yoon Kiyoung
이칭/별칭 경택(敬澤),무곡(茂谷)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강원도 영월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이희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56년연표보기 - 윤기영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75년 - 윤기영 무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896년 - 윤기영 을미의병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07년 - 윤기영 정미의병 참여
몰년 시기/일시 1907년 11월 19일연표보기 - 윤기영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1년연표보기 - 윤기영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출생지 윤기영 출생지 - 강원도 원주군 호저면 무장리
활동지 영월 - 강원도 영월군
활동지 원주 - 강원도 원주시
묘소 윤기영 묘소 - 강원도 영월군 무릉도원면 무릉리 지도보기
성격 의병장
성별 남성
본관 파평(坡平)
대표 경력 절충장군|중군장|전군장

[정의]

개항기 강원도 영월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

[개설]

윤기영(尹起榮)[1856~1907]은 무관 출신으로, 을미의병정미의병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가계]

윤기영의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자는 경택(敬澤), 호는 무곡(茂谷)이다. 아들은 윤지수(尹芝秀)이다.

[활동 사항]

윤기영은 1856년(철종 7) 지금의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무장리에서 태어났다. 1875년(고종 12) 무과에 급제한 후 절충장군에 임명되었다. 윤기영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정국이 혼란에 빠진 상황에 실망하여 낙향하였고, 당시 원주에서 교세가 확산된 동학(東學)에 들어가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무장 투쟁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모진 고초를 당하였다.

1896년 윤기영을미의병(乙未義兵)에 참여하였다. 1896년 겨울 유인석(柳麟錫)을 중심으로 호좌창의진(湖左倡義陣)이 결성되자, 윤기영은 영월과 원주 일대의 의병 약 200명을 이끌고 참가하였다. 이때 윤기영은 유격대 중군장을 맡아 일본군의 거점인 충주성을 함락하고 제천 등 여러 전투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호좌창의진이 해산한 뒤에도 윤기영은 독자적으로 부대를 편성하여 1907년까지 원주를 중심으로 영월·평창·제천 등지에서 의병 투쟁을 이어 갔다. 1907년(순종 1)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윤기영은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평창우편취급소를 공격하여 통신망을 절단하고 일본인을 공격하였다.

1907년 8월 13일 윤기영은 전국의 40여 의병 부대와 함께 의병 연합군 창설에 합의하고, 이강년(李康年)이 재건한 호좌창의진에서 전군장을 맡아 수많은 전투에 참가하였다. 8월 15일에는 약 2,000명의 의병이 합동 작전을 펼쳐 제천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10월 22일 윤기영은 민긍호(閔肯鎬) 부대와 함께 원주 싸리재 전투에서 일본군을 궤멸시켰으나, 11월 19일 강릉의 연곡역에서 적의 기습을 받아 부상을 입고 체포될 위기에 직면하자 자결하였다.

[묘소]

윤기영의 묘소는 영월군 무릉도원면 무릉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윤기영의 공적을 기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영월군지』 (영월군지편찬위원회·영월군, 2019)
  • 공훈전시사료관(https://e-gonghun.mpv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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