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3012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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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頭巖 傳說- 鄭澈- 豫言 |
영어공식명칭 | The Legend of Goduam and Jeong-Chul’s Prophecy |
이칭/별칭 | 「꼴두바우와 정철 선생」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 구래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남기택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2004년 10월 21일 - 차원희에게 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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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6년 2월 25일 - 『강원설화총람』 4권에 「꼴두바우와 정철 선생」이라는 제목으로 수록 |
관련 지명 | 고두암 -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 구래리 |
성격 | 설화|지명유래담 |
주요 등장 인물 | 정철|제자 |
모티프 유형 | 길흉화복의 예언 |
[정의]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 구래리에서 고두암과 관련하여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고두암 전설과 정철의 예언」은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 구래리 인근에 있는 고두암[꼴두바위]과 관련된 이야기인데, 조선 시대의 문신인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이 고두암 앞에서 그 지역의 부흥을 예언하였다는 내용이다.
[채록/수집 상황]
「고두암 전설과 정철의 예언」은 2006년 간행된 『강원설화총람』 4권에 「꼴두바우와 정철 선생」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2004년 10월 21일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 구래리로 현지 조사를 나가 주민 차원희[남, 75세]에게 채록한 것이다.
[내용]
조선 시대 선조(宣祖)[1552~1608] 때 송강 정철이 강원감사로 재직할 때 영월을 지나가다 고두암[꼴두바위]을 보고 넙죽 절을 하였다. 같이 왔던 제자가 무엇 때문에 큰절을 하느냐고 묻자, “장차 여기는 만성(萬姓)이 모여서 살 터라! 큰 바위 때문에 깊은 골짜기인 이곳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이 바위를 쳐다볼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정철은 고두암 지역이 장차 만 가지 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살 터라고 예언하였던 것이다.
고두암에는 또 다른 전설이 있다. 옛날 고두암 밑에 일찍 남편을 여의고 청상과부가 된 여인이 늙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주막을 내어 장사를 하며 살았다. 주막 앞길이 삼척 등지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이어서 장사가 잘되었고, 몇 년 지나지 않아 큰 부자가 되었다. 돈을 많이 모아 남부럽지 않게 된 여인은 소원이 있다면 남들처럼 아들을 얻는 일이었다. 또한 주막집 일도 오래하다 보니 손님이 많이 모여 지쳐 버릴 지경이었으나 시어머니의 은근한 감시가 있고 함부로 처신도 할 수 없어 남모르는 고민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날이 저물 무렵에 중이 찾아들었다. 여인은 시어머니 몰래 그 중을 극진히 대접하고 신세를 한탄하였다. 자식을 하나 두고 싶다면서 그 방법을 상의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이 말하기를 “아무도 모르게 고두암의 바위머리를 깨어 보라.”고 일러 주었다. 슬기로운 중은 여자의 힘으로 고두암 머릿돌을 깨는 일이 어려울 것을 알았다. 그 일에 정신을 모아 여타 고민을 잊게 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중의 말대로 여인은 이튿날부터 아무도 모르게 고두암 머릿돌을 깨는 데에 열중하였다. 그러자 얼마 후 고두암의 머릿돌이 깨어져 없어지게 되었다. 그 뒤로 주막에는 손님이 끊기고 한가한 날을 보내게 되었다. 오래지 않아 며느리의 소행을 알게 된 시어머니는 그 일을 괘씸하게 여기고 며느리를 학대하기 시작하였다. 끼니마저 제대로 주지 않아 여인은 아들을 낳아 보겠다는 간절한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를 가엾게 여긴 신은 그 여인 대신 고두암으로 하여금 잉태하게 하였다. 여인이 그토록 소원하던 아들을 수많은 중석(重石) 생산으로 대신함으로써 득남의 소원을 이루게 하였다는 전설이다.
[모티프 분석]
「고두암 전설과 정철의 예언」의 주요 모티프는 ‘길흉화복의 예언’이다. 「고두암 전설과 정철의 예언」은 영물에 의한 부흥의 예언이 이야기의 기본 축을 이루고 있다. 거대한 기암이라는 영물을 통해 관련 지역이 발전하리라는 예언적 목적에 충실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