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기 고경춘의 비련」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301315
한자 越妓 高璟春- 悲戀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강원도 영월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대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1975년 - 「월기 고경춘의 비련」 엄옹현에게 채록
관련 지명 낙화암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지도보기
관련 지명 금강정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지도보기
채록지 방절리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방절리 지도보기
성격 설화
주요 등장 인물 고경춘|신광수|이수학
모티프 유형 열녀담

[정의]

강원도 영월군에서 목숨으로 절개를 지킨 기생 경춘과 관련하여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월기 고경춘의 비련」은 영월부사(寧越府使)의 수청 요구를 거절한 월기(越妓), 즉 영월의 기생 고경춘(高璟春)의 이야기이다. 영월읍의 기생 고경춘이 전임 수령의 아들과 사랑을 하였고, 수령이 바뀌고 나서도 목숨으로 절개를 지켰다는 내용이다. 단, 이만회(李萬灰)의 아들과 사랑에 빠졌다는 것은 비문의 기록과 다르다. 비문에 따르면 이만회에게 처음 몸을 허락하고 이후 절개를 지켰다고 하였다. 1967년에 간행된 『향토지(鄕土誌)』에서 고경춘과 이만회의 아들을 연결시키고 있으니, 이는 고경춘의 나이가 어리다는 점 때문일 것이고, 고소설 「춘향전(春香傳)」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채록/수집 상황]

「월기 고경춘의 비련」은 1975년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방절리에서 엄옹현[남, 70세]에게 채록하였다.

[내용]

조선후기 영조 때 영월읍에 고순익(高舜益)이라는 마음씨 착한 선비가 부인과 함께 살고 있었다. 고순익은 평소에 단종(端宗)[1441~1457]을 추모하면서 자식 얻기를 열망하였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로 단종이 돌아가신 지 300년 후 기일[1757년 10월 4일]에 예쁜 딸을 얻었다. 고순익은 단종노산군(魯山君)이 점지하여 준 옥(玉)같이 소중한 자식이라는 뜻으로 딸의 이름을 ‘노옥(魯玉)’이라고 지었다. 노옥은 어릴 때부터 예의범절이 뛰어나고 용모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글도 잘하여 부모님과 이웃으로부터 칭찬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3년 후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노옥은 어린 남동생을 데리고 어려운 가정을 꾸려 나갔다. 그 후 의지할 곳이 없던 노옥은 할 수 없이 이웃에 사는 추월(秋月)이라는 늙은 기생의 수양딸이 되었다. 하지만 양어머니인 추월의 생활이 넉넉하지 못하여, 노옥도 결국은 기생이 되고 말았다.

뛰어난 미모와 능한 가무 솜씨를 가진 노옥은 ‘경춘(瓊春)’이라는 기명(妓名)을 갖게 되었다. 경춘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온갖 유혹을 다 받았으나, 몸가짐을 깨끗이 함으로써 그 명성이 날로 높아 갔다. 그러던 중 경춘이 열여섯 살 되던 해 장릉(莊陵)에서 영월부사 이만회의 아들인 이수학(李秀鶴)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영월부사인 아버지가 한양으로 영전하니 이수학은 경춘에게 과거에 급제한 후에 백년가약을 맺겠다고 굳게 약속하고, 3년만 기다려 달라고 한 뒤 서울로 떠나고 말았다.

그 후 영월부사인 구협(具挾)이 병으로 죽고 그 후임으로 당대의 문장가인 신광수(申光洙)[1712~1775]가 영월부사로 부임하였다. 신광수가 경춘에게 수청 들기를 강요하자 경춘은 전임 부사의 아들인 이수학과의 관계를 말하며 청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영월부사 신광수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수청을 들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하였다. 이에 경춘은 부모님 산소를 찾아가 하직 인사를 한 후, 한양에 있는 이수학이 주고 간 사랑의 증표를 지닌 채 단종을 모시는 시녀들이 투신한 금강정(錦江亭) 낙화암(落花巖) 절벽에서 몸을 던졌다. 열여섯의 어린 나이로 끝까지 절개를 지킨 것이다.

1773년 12월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영월부사 신광수를 지난날의 속되고 모진 잘못으로 파면시켰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경춘금강정에서 투신한 지 두 달 후에 영월부사 신광수는 결국 삭탈관직을 당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경춘이 순절한 지 20여 년이 지난 1795년(정조 19)에 순찰사 이병정(李秉鼎)[1742~1804]이 후원하고, 평창부사 남의로(南義老)가 글을 짓고, 영월부사 한정운(韓鼎運)이 글씨를 써서 낙화암월기경춘순절지처(越妓瓊春殉節之處)라는 비석을 세웠다.

[모티프 분석]

「월기 고경춘의 비련」은 기생의 절개를 통하여 조선 후기 평민의 자존 의식이 그만큼 상승하였음을 보여 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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